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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조선일보 방응모의 친일매국 행각2021-10-20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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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방응모의 친일매국 행각

- 뼈속깊이 일제강점에 충성했던 신문 -


                               박인식(언론사학자, 언론소비자주권행동 정책위원)


조선일보가 창간한 것이 1920년이니 작년이 100주년이다. 일제강점기에 친일매국행각을 벌여왔고 6.25때는 김일성을 찬양하기도 했으면, 군사독재정권에 철저히 아부하는 등 백년동안 민족을 배신하고 기만해온 신문이다. 이 신문이 유럽에 있었다면 벌써 폐간이 되었을 터이다. 일본과 중국의 대학에서 줄곧 일제강점기의 언론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던 필자는, 조선일보의 만행 가운데 일제강점기의 친일매국행각을 주제로 지난달 언론소비자주권행동에서 강연한 바 있다. 본고는 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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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단체가 창간한 조선일보


3.1운동 거사는 강제합병이후 10년 동안 한 건도 신문 발행허가를 해주지 않던 조선총독부가 3개의 민간신문(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신문)을 허가해준 계기가 되었다. 그 이전까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경성일보, 매일신보, 서울프레스 등만이 발행 독점하다가 이때부터 민간지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총독부는 1920년 1월 6일 친일단체인 「대정친목회(大正親睦會)」에  발행허가를 내주었다. 대정이라는 말 자체가 1912년부터 시작된 일왕의 연호에서 따온 명칭이다. 대정친목회는 조선인 전직 관료와 조선귀족, 대지주, 실업가 등이 참여해 만든 단체다. 조선 민중이 일제의 무단통치에 잘 순응하도록 하는 방안을 연구하는 단체였던 것이다. 


조선일보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인쇄시설을 이용하여 1920년 3월 5일에 창간호를 냈고 4월 28일에 제4호를 발행했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일보 역사는 창간과 폐간(1920.3~1940.8)까지의 시기 구분을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는 1920년 3월 창간부터 1924년 9월까지 송병준 등 친일파 유력인사가 경영하던 시기였다. 즉 원래 뿌리는 친일파들의 신문이었던 것. 제2기는 1932년까지 송병준으로부터 판 건을 양도 받은 신석우가 이상재, 안재홍 등과 함께 신간회의 기관지로 역할하던 시기다. 이 시기는 민족지로 이름할 만하다. 하지만 방응모가 인수한 제3기인 1933년부터 1940년 폐간까지는 전형적인 친일매국행태를 보였다.



조선일보가 방응모에게 넘어간 배경 - 재만주동포의연금 횡령 사건


조선일보의 제2기라고 할 수 있는 1925년에 조선총독부는 만주에서의 조선인 독립운동을 막을 목적으로  만주 봉천성(奉天省과 소위 ‘미츠야 협정(三矢協定)’을 체결했는데, 이 협정으로 인하여, 조선인 민족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만주 장작림 군벌정권의 탄압이 본격화되고, 조선인 이주민들에 대한 만주군벌 당국의 박해가 증가되었다.

이러한 시국으로 인하여 신간회는 1927년말  ‘재만동포옹호동맹 (在滿同胞擁護同盟)’을 조직하여 대책을 수립하여 실행하려고 국내외에서 재만주 동포의연금 모금을 시작했다. 이즈음 조선일보사는 방만한 경영으로 재정난은 가중되어 가고 있었고, 이때 조선일보 간부진이 이 돈을 건드린다. 만주동포의연금을 횡령한 것이다. 게다가 당시의 오보사건으로 총독부의 감시를 받으면서 횡령사건의 책임이 무겁게 되면서 관계자들이 구속되고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금광을 캐어 떼돈을 번 방응모에게 소유권이 넘어가게 된다. 


방응모의 『조선일보』 인수


 

방응모는 1883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16세 때까지 한학을 배웠고, 교편을 잡기도 하였는데, 한때 자신이 살던 집을 이용해 여관업을 하기도 하였다.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하고 지국장을 맡으면서 신문업과 인연을 맺었다. 방응모는 1927년 『동아일보』정주지국 지국장에서 물러나 고문직을 맡았고, 1930년 정주에서 평북도 평의회원 선거에 입후보했지만 낙선한 일도 있었다. 


1924년경에 금광개발에 뛰어들어 폐광상태로 있던 평북 삭주의 교동(橋洞) 광업소를 인수해 금을 채굴해 굴지의 광산업자가 되었는데, 이때 금맥을 캐게 된 것이 방응모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1932년 교동광산을 135만원을 받고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매각 정리한 후, 조만식의 권유로 재정난으로 허덕이던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였다.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사업(육영사업과 조림 및 간척사업) 등을 벌였다. 그리고는 1933년 조선일보사의 부사장에서 사장이 되었다.


방응모의 친일 행각과 조선일보의 아부기사


방응모는 『조선일보』의 부사장으로 취임하기 10여일 전 1933년 3월 12일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에 고사기관총(高射機關銃) 구입비로 1,600원을 헌납하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친일 매국행위가 시작이 되었다.

조선일보는 방응모가 경영권을 인수한 이후인 1933년 12월 24일에 노골적으로 일본 왕실을 찬양하고 아부하는 사설 <황태자 전하의 탄생>을 게재하였다. 이 사설에서 조선일보는 “일본은 다른 나라와 달라서 건국 이래로 황실은 곧 일본 전민족의 대종가라는 신념이 잇고, 더욱 명치천황폐하의 어우(御宇)에 이르러 일본이 일약하야 세계의 대국이 되매 일본국민의 황실을 존숭하는 정은 더욱 깊어졌고 근년에 이르러서는 황실중심의 국민주의가 최고조에 달하였음을 본다.”

1934년 3월 방응모는 조선총독부와 군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인과 일본인 합작으로 만들어진 대 아시아주의 황도사상단체인 「조선대아세아협회」상담역으로 추대되었다. 이 단체의 목적은 ‘아시아의 대세와 시국의 진상을 규명하고 황국 대일본과 아시아 제국과의 친선을 도모한다’고 밝혔다.


1935년 7월에는 경성 태평로1가에 새 사옥을 준공하였고, 1937년 2월 원산의 순회강연에서는 ‘우리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하여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이미 정해 놓은 방침에 한 뜻으로 매진한다’는 망언을 서슴치 않아 참석자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일까지 일어났을 정도였다. 


아부의 극치를 달리는 일제 찬양


조선일보는 1937년 4월 29일 조간 1면에서 ‘봉축천장가절(奉祝天長佳節)’이란 표제와 함께 일왕 부처의 사진을 게재하면서 ‘천장절제어예정(天長節際御豫定)’이란 일왕 생일 축하 행사 소개 기사를 실었고, 1937년 11월 3일 일본 메이지 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소위 ‘메이지절(明治節)’에는 <금일(今日)이 메이지절(明治節) 거행(擧行)할 봉축절차(奉祝切次)>란 축하 행사 소개 기사와 함께 일본 왕실에 충성을 맹세하는 강령인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序詞)’를 일본어로 게재하였다.


일제의 난징학살을 찬양하고 미화하다


방응모의 조선일보는 일제의 중국대륙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활동에도 적극 나섰다. 1937년 8월 2일 사설, <총후(전쟁 중의 후방전선)의 임무-조선군사후원연맹이 목적>에서 “제국신민으로서 응분의 의무와 성의를 다하고자 시국대책을 강구 실시하고 있는 중 조선군사후원연맹은 그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황군의 사기를 고무 격려하는 것이 이 후원연맹의 중요 임무…… 라고 보도하여 조선 민중들로 하여금 일제의 침략 전쟁을 후원하도록 촉구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8월 12일 사고(社告)를 통하여 조선일보사와 사원들이 솔선해서 헌금한 사실을 밝히면서 “북지사변(중일전쟁) 발발 이래 민간의 국방헌금과 군대위문금은 날로 답지하는 형편인데, 본사에서는 일반 유지의 편의를 위하여 이를 접수 전달하려 하오니 강호 유지는 많이 분발하심을 바랍니다”라고 사고를 내면서, 일제의 침략 전쟁에 조선 민중을 동원하는 기사나 사설에 뿐만 아니라 솔선수범해서 친일과 전쟁물자 원조에 전면으로 나섰다. 

약 30여만 명을 학살하여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살상으로 기록된 일제의 난징 점령 및 난징 학살을 찬양·미화하는 보도를 하였다. 방응모는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을 통해서도 「극동의 화인(禍因)된 지나의 배일」이란 제목으로 「지나는 쓸데없는 배일을 일삼아 제국에 도전하여 극동의 평화를 교란시키므로 일본제국은 극동화인이 되는 지나의 배일을 절멸케 하여 극동평화를 확립시키려 한다」는 내용을 강조하였다. 그 밖에도 그는 제1차 「전조선 순회 시국강연회」와 제2차 「시국 강연반」을 조직할 때 경기도를 담당하고, 강연반을 통해 「지나 사변의 원인과 지나에 대한 세계열국의 대세와 금후 국민의 각오」, 「지나 사변과 제국의 결의」, 「지나 사변과 정부방침」이라는 주제로 많은 강연을 하였다. 

방응모의 강연내용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전국민이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시국인식과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일 왕실에 충성을 맹세하는 강령인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序詞)>


조선일보는 1938년 1월 1일 조간 1면에서 일왕 부처의 사진 및 일본 왕실의 문장인 국화문양을 큼지막하게 덧붙이며 <원단(元旦)·궁중(宮中)의 어의(御儀)>란 일왕실 신년하례식 소개 기사를 게재하였다. 이와 함께 또다시 일 왕실에 충성을 맹세하는 강령인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序詞)>를 일어로 게재하였다. 또한 1938년 4월 29일 조간 1면에서도 <봉축(奉祝)>이란 큰 글자를 덧붙이며 일왕 부처의 사진과 <봉축천장가절(奉祝天長佳節)>이란 일왕 생일 찬양 사설을 게재하였다.


전쟁참여를 독려하는 조선일보


조선일보는 1938년 1월 1일 조간에 <조선(朝鮮) 사명(史命) 중대(重大) 각오(覺悟)를 새롭게 하라>는 제목의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의 기고문을 게재, 일제의 침략전쟁에 조선 민중을 내모는 데 협조하였다. 또한 1938년 1월 1일 신년호 기이(其二)에서는 <전시체제 하의 정치군사·행정... 전쟁의 목적은 승리! 승리엔 무엇이 필요? 국가 총동원적 총후의 진영>이란 기사를 게재, 침략전쟁 수행을 위해 조선민중을 더욱 억압·착취·수탈의 길로 총동원하려는 일제의 시책에 적극 협력하는 보도를 하였다.

그리고 1938년 2월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로 조직된 「조선춘추회」, 일명 ‘전 조선신문사대표자회’에서 방응모는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달, 방응모가 발기인으로 참여한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는 유력한 친일인사들이 다수 참가한 친일단체인데, 이 단체는 조선에서 육군특별지원병제도가 실시되는 것을 궁극적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조선일보는 1938년 6월 15일 육군지원병훈련소 개소를 맞아 사설과 1면 머릿기사로, 일제가 1938년 4월경 조선 청년을 일제 침략 전쟁의 도구로 활용하기 위하여 만든 <‘육군특별지원병제’>에 대하여 “……조선통치사의 한 신기원을 이룩한 것……미나미 총독의 일대 영단 정책하에 조선에 육군특별지원병제도가 실시된 것에 대하여 이미 본 란에 수차 우리의 찬의를 표한 바가 있거니와……황국신민화된 사람으로 그 누가 감격치 아니하며 그 누가 감사치 아니하랴……장래 국가의 간성으로 황국에 대하여 갈충진성(竭忠盡誠)을 다할 것……그래서 국방상 완전히 신민의 의무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보도하였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중국 침략 한 돌을 맞은 1938년 7월 7일 사설, 머릿기사 등 전 지면에서 <“열철일타의 일본혼이 총후국민의 위력과 같이 동아의 신질서 건설의 발단을 만든 국민 감격의 기념일인 7월 7일을 맞이하여 전 조선의 도시 농산 어촌에 들끓는 총후 황국신민의……물적 심적 총동원의 체제는 귀한 호국의 영령에 바치는 조의와 출정 장병의 신고를 생각게 하는 뜻깊은 여러 가지 행사”>라고 보도하여 일제의 중국대륙 침략전쟁을 적극 미화하는 보도를 하였다. 이것은 조선의 젊은이를 일제의 침략 전쟁 수행을 위한 총알받이로 내몰기 위한 조치인 지원병제도를 찬양 홍보한 것이다. 1938년 11월 4일 석간에서 <동아 신질서의 건설... 제국 불퇴전의 태도성명>이란 사설을 통해 일제의 중국침략을 미화하고 조선민중의 적극 동참을 요구하고, 중일전쟁 발발의 책임을 중국정부에 돌렸다. 그러면서 일제의 침략 전쟁 수행을 뒷받침하기 위해 조선 민중의 내핍 생활을 요구하기도 했다.


일제찬양과 아부에 매진한 1930년대


1939년 1월 1일 석간 1면에서 <천황폐하(天皇陛下)의 어위덕(御威德)>이란 제목과 함께 국화 문양이 곁들인 일왕 부처의 사진을 게재하였다. 1939년 2월 11일에도 초대 신무왕(神武王)이 즉위한 날이라 하여 일본 건국일로 기념하는 소위 ‘기원절(紀元節)’이라 하여 조선일보는 사설 <기원절(紀元節)>을 게재, 일 왕실을 찬양하였다. 

2월 11일에도 소위 ‘기원절(紀元節)’(일본의 건국기념일) 축하식을 가졌고 7월 7일에는 소위 ‘지나사변 2주년 기념식’을 오전 9시 30분 조선일보사 대강당에서 전 종업원이 모인 가운데 1) 국가합창(일본국가 기미가요 합창), 2) 동방요배(일왕이 사는 곳을 향한 궁성요배), 3) 전사 장병묵도, 4) 황국신민서사 낭독, 5) 식사, 6) 천황폐하 만세삼창 등의 순으로 거행하였다.

1939년 4월 29일 사설, <봉축천장절(奉祝天長節)>에서 “……춘풍이 태탕하고 만화가 방창한 이 시절에 다시 한 번 천장가절(天長佳節)을 맞이함은 억조신서(億兆臣庶)가 경축에 불감(不堪)할 바이다. 성상 폐하께옵서는 옥체가 유강하시다니 실로 성황성공(誠惶誠恐) 동경동하(同慶同賀)할 바이다. 라고 일왕을 적극 찬양하고 협력하는 보도를 하였다.



1940년 1월 1일 조간 1면에서 <천황폐하(天皇陛下)의 어위덕(御威德)>이란 제목과 함께 일왕 부처의 사진을 싣고, 제호 위에 일장기를 게재하였다. 

1940년 2월 11일 조간 1면에서는 <봉축(奉祝) 황기이천육백년(皇紀二千六百年) 기원절(紀元節)>이란 사설을 게재하였다. 이 기사에서도 “양춘이 내복하고 만상이 활발하여 서기가 팔방에 충만한 이날에 황기 이천육백년의 기원절을 마지하는 것은 야마토(大和)민족 전체의 감격과 녹행이 무상한 바이다”,라고 운운하며 역시 일본 왕실을 찬양하고, 일제의 침략전쟁 수행에 조선민중이 적극 협력해야 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조선일보는 폐간 4개월 전인 1940년 4월 30일에도 일왕의 생일을 맞아 “황공하옵게도 천황 폐하께옵서는 이날에 제39회 어탄신을 맞이하옵시사……신자(臣子)의 충심으로 흥아성업도 황위하에…라고 하면서 지금껏 사용해 왔던 신민 대신에  ‘신자(臣子)’라고 일왕의 자식으로 표현하여 아부가 극에 치달았다. 

조선일보의 위와 같은 보도는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최정점이자 상징인 일본 왕과 황실을 찬양, 미화하고 일제의 시책에 적극 협력하는 것으로써 일제강점기 독립을 염원하는 민족정신을 좌절로 몰았고, 조선을 영원한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 나지 못할 것으로 보도하여 친일 반민족 언론행위를 한 것이다.


충성과 아부행위에도 자진폐간한 조선일보


방응모는 총독부의 언론통제가 강화되고 신문 통폐합 정책이 대두되자 1940년 3월 『조광』 발행인으로 취임하고 8월에 『조선일보』를 폐간하였다. 폐간사 내용에, “조선일보는 신문통제의 국책과 총독부 당국의 통제방침에 순응하여 금일로써 폐간한다 … 지나사변(중일전쟁) 발발 이래 본보는 보도보국의 사명과 임무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고 더욱이 동아 신질서 건설의 위업을 성취하는 데 만의 일이라도 협력하고자 숙야분려한 것은 사회일반이 주지하는 사실이다.” 라고 적고 있다.여기서 폐간사 내용 중에 ‘순응하여 폐간한다.’라고 적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총독부 정책에 순수히 따른 것으로 짐작된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조선일보에 대해 “새로운 충신이 나타나서” 자신과 경쟁한다면서 … 총독부는 ‘비슷한’ 신문이 셋이나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중략) 충성을 다하는 신문들이니 일본은 기자들을 재취업시키는 수고까지 떠맡았고, 신문사에는 보상금을 주었다고 한다. 전투기 한 대가 10만원이던 때 100만원이니, 거액의 보상금이다”라고 보도하였다. 조선일보는 일제 충성을 다하는 신문이니 폐간에 따른 기자들의 재취업과 보상을 해 주었는 기사다. 총독부 기관지조차 조선일보가 친일 신문이라 것을 인정한 것이다.  


잡지 조광을 통한 방응모의 친일매국행위


방응모는 일찍이 1935년 10월에 잡지 『조광』을 창간했다. 나중에 방응모는 조선일보를 폐간한 후부터는 잡지 조광을 통해서 직간접으로 친일 아부 행위를 이어간다. 『조광』을 본격적으로 친일잡지로 개편하고 그 자신이 직접 친일논설을 기고하는 등 친일행각을 이어갔다. 


특히 『조광』「창간5주년사」에서 「國民된 者로서는 누구나 實로 最後의 覺悟를 하지 않으면 안될 때를 當하였습니다. 안으로는 新體制의 確立, 밖으로는 革新外交政策을 强行하여 하루바삐 東亞新秩序建設을 完成시켜서 世界의 新秩序를 建設하고 한걸음 나아가서 世界永久平和를 企圖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또한 『조광』은 조선어 잡지임에도 불구하고 일문기사를 게재하는 등 일제의 열렬한 시국선전 잡지로 이끌어 갔다. 1941년에는 친일잡지 『삼천리』의 사장인 김동환의 발기로 전시보국단체인  「임전대책 협의회」가 결성되었는데, 방응모는 이 단체의 위원으로 참여하여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서 전비조달을 위한 채권가두유역대(종로대: 방응모, 윤치호, 한상룡, 최린, 이광수 외 다수. 황금정대: 박흥식, 고원훈 외. 남대문대, 본정대, 명치정대, 경성역대, 서대문대, 종로4정목대, 동대문대, 청량리대, 연락본 등에 다수가 참여)를 편성해서 경성 11개 장소에서 채권판매운동을 전개해서 전쟁경비를 조달할 목적으로 일제가 내놓았던 1원짜리 꼬마 채권을 거리에서 판매했다. 


1941년 10월에 들어 친일단체의 총집결장인 조선임전보국단으로 해체·통합되었다. 「조선임전보국단」은 조선인이 전쟁협력을 위해 임전대책협의회와 흥아보국단을 통합시켜 결성한 전시체제기의 최대 민간단체로 방응모는 발기인과 이사로 참여했다. 방응모는 점점 친일논조가 강해지면서 1942년 2월 호 『조광』에 「대동아전과 우리의 결의」특집에서 「타도 동양의 원구자(怨仇者)」라는 본격적으로 영미(英美)를 규탄하는 논설을 썼다. 이 글은 태평양전쟁 개전 직후에 소식을 들은 뒤 쓴 감상문이었다. 


방응모는 영국과 미국을 「동양의 원구자요, 전체의 죄인」으로 규정하고 「동양을 침략하고 유린하고 또 임의로 착취하여 동양인을 멸시 천대」한 데서 찾았다. 따라서 〃이번 대동아전쟁은 그들에게서 동양을 이탈하여 공영권을 건설하고 세계의 평화를 도모하려는 것은 물론이지만 일편으로 보면 참아오던 원한 폭발이라고도 할 것이다"라며 일본은 평화의 사명국가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방응모는 1942년 2월 특집에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군관당국을 절대로 신뢰하여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 것을 주장하고 아울러 일하지 않는 사람은 국민이 아니라는 관념을 깊게 가지고 국민개로(國民皆勞)운동에 동참하고 물자절약에 솔선하며, 전비확충의 바탕이 되는 저축강화 등을 촉구”하고 있다. 어떻든 반도민중은 이때에 물력(物力)과 심혈을 총 경주하여 국책에 협력할 것을 다짐하자는 것이었다.


방응모의 최후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지만, 방응모는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 자택에 머물다가 1950년 7월 6일 납북되었다고 한다. 1950년 9월 28일, 북한 개성의 서흥군 송악산 부근에서 트럭에 실려 끌려가던 도중, 갑자기 미군기4대가 날아들어 조명탄을 터트리고 폭탄과 기총을 퍼부어 방응모는 이 공습으로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시신은 서흥군 인민위원회에 맡겨져 장례가 치러졌고, 서흥 부근에 매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마무리


한국신문의 근대적 발아점을 되돌아 볼 때, 제국일본의 식민지하에서 발간된 조선어 민간 3지 중, 2개지가 현존하여 한국언론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민간 3지의 하나였던 『조선일보』가 재벌 언론사로 급성장한 것은 일제지배하에서 철저한 친일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오늘날까지 신문재벌 방씨 일가로 연결되어 있기에 단순히 방응모라는 개인차원을 넘어 한국언론사 연구에서는 『조선일보』와 방응모를 나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방응모의 친일행각은 직접적으로 각종 친일 관변단체에 참여해 현지 강연과 각종 매체를 통해 일제통치와 군국주의를 찬양했고,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서는 식민지 통치 찬양, 황실 숭배, 침략전쟁 미화 등의 아부성 기사를 통해 친일매국행위를 하였다.


또한, 『조선일보』의 자매지 『조광』을 통해 방응모는 친일논설을 직접 써서 일제의 전쟁 도발을 찬양하거나, 일제의 침략전쟁에 전조선인이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시국인식과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활동을 했던 점을 조광에 실린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방응모가 어떤 인물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별도의 인물연구가 필요하겠지만, 그는 일제하에서 적극적인 친일활동과 일제 식민지 통치권력의 유착을 통해 『조선일보』를 반민족 언론기업으로 육성시킨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방응모는 조선일보와 조광을 통해서 ‘친일 매국행위’를 일삼고 조선민중의 ‘민족독립 의지’를 좌절시키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에서 반민족 언론 기업인이었다는 점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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