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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3.1절 102주년 화상강연, "프랑스는 왜 나치협력자를 철저히 처벌했는가?" - 이종호박사2021-03-16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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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왜 나치협력자를 철저히 처벌했는가?

 

이종호, KAIST 교수, 프랑스 과학국가박사

 

 

들어가는 말

한달전 미국 법무부는 육십년 넘게 미국에서 살아온 95세 노인을 독일로 강제 추방했다. 2차 세계기간 중 나치수용소에서 일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카를 베르거는 지난 1945년 독일 나치수용소에서 경비원으로 일한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당시 19살에 불과하여 명령만 받았을 뿐이라는 베르거의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미국은 나치의 반인륜적 범죄에 참여한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친일파 진상 규명 등 과거청산 문제가 대두되었지만 유럽에게는 먼나라 이야기다. 유럽 각국이 독일의 치하에서 벗어나자마자 나치 협력자들을 철저하게 처리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해국인 독일조차도 1946년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 등을 통해 나치지도부를 숙청했다.

우리가 눈여겨볼 나라는 프랑스다. 우리보다 강점의 기간은 상대적으로 짧지만 괴뢰정부가 들어서고 여기에 동조한 언론인 지식인들이 처형을 포함하여 철저하게 처벌받았기 때문이다. 그 역사를 반추해 본다.

 

해방 전부터 시작된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

프랑스가 히틀러의 공격에 희생된 것은 독일의 기상천외한 프랑스 국경 우회작전 때문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히틀러는 프랑스를 침공하는데 절묘한 아이디어를 사용했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마지노선을 건드리지 않고 벨기에와 프랑스 국경의 틈새인 아르덴 숲을 돌파하면서 중립국을 우회하여 공격하면서 610일 프랑스 정부는 파리에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1차 세계대전 당시 베르덩 전투의 영웅이면서 당시 스페인 대사로 나가있다가 급거 귀국하여 부수상을 맡고 있던 페탱은 패배를 인정하고 독일과의 휴전협상에 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력도 형편없는 프랑스가 끝까지 싸워 완전한 몰락에 이르기보다는 일부의 프랑스 군대라도 잔존하여 질서를 유지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프랑스가 제2의 폴란드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항복보다는 독일과 비시 정권의 휴전협정의 결과가 보다 프랑스에 이익을 안겨준다는 것은 큰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적국으로 규정된 독일의 점령의 목적에도 부합된다는 구조적 모순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망명정부 자유프랑스>를 창설한 드 골 장군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194065일 국방차관에 임명된 드골 소장은 영국으로 긴급 도피한 후 BBC 방송을 통해 페탱의 휴전요구에 반대하고 끝까지 저항하자는 방송을 내보냈다. 이어서 <망명정부 자유프랑스>가 해외에서 나치독일과 전면전을 치르겠다고 프랑스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드골의 선언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페탱 정부는 나치독일과 휴전협정을 목표로 삼아 수립되었기 때문에 정통성을 상실했다. 프랑스대혁명 때의 헌법(1793)에 의하면 프랑스 국민은 프랑스 영토를 점령한 적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없다.

페탱 정부는 휴전에 동의하여 무조건 항복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국민을 나치독일의 노예상태로 전락시켰으므로 불법적인 정부이다. 페탱 정부가 휴전협정에 서명한 것은 민족이익을 배반한 것이므로 <망명정부 자유프랑스>만이 정권의 정통성과 합법성을 획득했다.

페탱 정부가 나치독일과 맺은 휴전협정도 무효이다. 협정 제10호에 프랑스 국민에게 나치독일에 반대하여 무기를 들고 투쟁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드골은 휴전협정의 무효화 논리를 근거로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했으며 점령지역 내 저항운동을 조직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여하튼 영국에서 드골은 <망명정부 자유프랑스>를 이끌면서 프랑스 국내의 반 나치저항운동을 지휘하고 연합군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나치독일과 싸웠다. 그러므로 사상 최대의 상륙작전으로 불리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19446월 프랑스가 해방되기 시작할 때까지 4년 간 프랑스에는 두 개의 정부가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드골 장군의 일성

드디어 드골은 개선장군으로 입성했다. 1944825일 폰 콜티츠 독일군사령관이 항복하면서 수도 파리는 해방되었으나 프랑스 전국이 완전히 탈환된 것이 아니므로 제헌의회를 구성할 수 없었다. 드골은 임시정부의 대통령 자격으로 독일과 전쟁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해방된 지역에서는 나치협력자들을 철저하게 정리하겠다고 발표했다. 한마디로 이들은 반역 부역자라는 뜻이고, 비시 정부와 정권을 뒷받침하고 있던 부역자들과의 전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런 첨예한 논쟁은 내전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드골의 서슬퍼런 나치협력자들에 대한 숙청은 곧바로 원리적인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페탱의 독일과의 협력이 과연 프랑스를 독일의 직접적인 점령과 수탈로부터 방어한 차선책이었던가 아니면 프랑스의 불이익과 그 국민의 고통을 초래한 이적행위인가이다. 물론 이 문제는 프랑스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네덜란드, 벨기에, 노르웨이 등에서도 벌어졌다.

하지만 드골은 그전부터, ‘국가가 애국적 국민에게는 상을 주고 민족배반자나 범죄자에게는 벌을 주어야만 비로소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 있다고 하면서 민족반역 범죄자는 자유박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프랑스의 패배를 악용한 투항주의자들, 프랑스 국민을 악의 길로 인도한 비시정권의 고위공직자들과 추종자들, 그리고 나치독일의 승리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협력한 프랑스인들로 규정했다.

그즈음 망명정부 영향권에 있던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나치협력자 체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비시정권의 각료를 지낸 벨주레 장군이 체포되었다. 알제리 태생 사업가로 비시정권의 내무장관에 임명된 피에르 퓌쉬도 <프랑스전국해방위원회(French Committee of National Liberation)>의 명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퓌쉬는 자신은 정치적 속죄양이라고 변호하면서 모든 자신의 행동이 전임자의 계획을 그대로 집행했을 뿐이라고 항변했지만 사형이 선고됐고 1944320일 총살당하였다. 또 다른 비시 정부의 각료였던 쟌 베르제레 역시 <자유 프랑스>에 의해 체포되어 적과의 부역, 반역, 국가안전의 위해혐의로 처형되었다. 한 때 비시정부 각료를 지내다가 라발 총리의 복귀에 반대하여 사임한 마르셀 페이루통도 <숙청위원회>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고 역시 비시의 각료였던 플란뎅, 부와송 장군도 체포되었다.

드골이 이와 같이 비시정권의 전직 고위공직자들을 체포하자 독일과 전면적인 전쟁을 벌이고 있는 영국과 미국은 곧바로 반발했다. 처칠은 북아프리카 전쟁이 급선무이므로 연합국에 어느 정도 협조하고 있는 비시 정권의 이탈을 원하지 않았다. 드골은 연합국의 반발이 예상외로 커지자 루즈벨트의 요구에 일단 순종함으로써 재빨리 불씨를 잠재웠다. 그리고 일부 공직자들을 석방하는 제스처도 취했다.

 

나치협력자 청산을 위해 좌우 연합을 통한 거국내각 구성

하지만 프랑스 본토가 해방되기 시작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우선 파리의 레지스탕스와 시민봉기군은 연합군이 입성하기 전인 1944825일 독일점령군 사령관 폰 콜티츠 장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드골은 다음날인 826일 파리에 나타나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그런데 정가의 촉각은 임시정부의 수반이 된 드골의 생각이다. 당시 레지스탕스에는 공산당이 상당한 세력으로 참여했는데 유럽의 대표적인 우파 지도자인 드골이 공산주의자들과 연합할 수 있는가이다.

드골은 주저하지 않고 좌파를 거국내각 속에 포함시킴으로써 나치부역자를 처벌하는데 좌우파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물론 드골은 공산당이 프랑스의 합법적인 정치공간에 합류하는 조건으로 혁명노선을 포기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공산당은 드골의 조건을 수락했다. 드골의 임시정부는 나치독일의 점령상태로부터 해방되는 지역마다 나치협력자 숙청을 우선적 과제로 삼아 집행하라고 요구했다. 드골은 나치협력자 숙청의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치협력자들은 정치적 결정, 주로 정치활동과 때로는 군사행동 그리고 행정조치 및 언론의 선정활동 등의 변화무쌍한 형태로 프랑스 민족의 굴욕과 타락뿐만 아니라 나치독일의 박해마저도 미화했다.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나치협력자들의 엄청난 범죄와 악행을 방치하는 것은 국가전체에 전염하는 흉악한 종양(腫瘍)들을 그대로 두는 것과 같다.’

그의 주장은 단순하다. 국가와 민족을 배반한 나치협력자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들이 만든 썩은 종양들이 종국에는 나라를 모두 부패시켜 프랑스를 망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당시 나치협력자로 규정된 사람은 다음 3가지였다.

자유박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프랑스의 패배를 악용한 투항주의자들

프랑스국민을 악의 길로 잘못 인도한 비시정권의 고위관료들과 추종자

나치 독일의 승리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협력한 프랑스 사람

 

정통성을 이어받은 임시정부

드골이 독일 점령에서 해방된 지역부터 나치협력자들을 숙청하면서 프랑스의 정통성을 이어갔다고 하지만 그에게도 고민이 있었다. 우선 프랑스 국내에서 독일에 강력하게 저항하던 반 나치저항단체들도 어느 정도 강력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그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점은 미국 등 연합국이 드골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특히 미국은 시민 폭동과 같은 무질서 상황이 벌어진다면 프랑스가 독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지 않았다는 것을 구실로 군사정부의 설치할 가능성도 있었다. 더욱이 드골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는 것은 미국이 비시정권을 승인하면서 공식적인 수교관계를 맺는다면 거꾸로 비시정권이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드골에게 주어진 급선무는 프랑스 내의 반 나치저항단체들을 재빨리 포섭하면서 미국의 군정 계획을 무산시키는 것이었다. 드골은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속한 조치를 취했다. 우선 페탱의 비시정권이 계속 연합국의 승인을 받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자신이 지휘하는 임시정부와 반 나치저항단체에 의해 프랑스가 프랑스를 해방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도록 모든 조치를 취했다.

드골은 해방되는 지역에 곧바로 임시정부의 요원을 급파해 비시정권의 장악 하에 있던 지방행정기관을 먼저 접수했다. 어느 지역에서는 연합군이 점령하기도 전에 이미 드골의 요원들이나 지역 레지스탕스들이 기관을 접수하기도 했다.

가장 큰 문제점은 프랑스가 단번에 해방된 것이 아니라 나치독일의 철수에 따라 단계적으로 해방되었기 때문에 드골의 임시정부에 앞서 해방 지역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나치부역자들을 숙청하는데 앞장섰다는 점이다. 일부 지방에서는 공산당 세력이 주력인 반 나치저항세력이 나치협력자에 대한 인민재판과 즉결처분을 시행하기도 했다.

해방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틱시에는 1944년 말과 1945년 초에 이르기까지 약식 처형된 자가 약 105,000명에 이른다고 보고했지만 1953년 당시 수상이자 내무장관이었던 앙리 퀘이으는 의회 위원회에서 약식처형자가 9,675명이었다고 보고하였다.

일반적으로 가장 신빙성 있다고 인정받는 것은 역사학자 로베르 아롱에 의해 수행된 조사로 그는 19446월부터 19455월까지 프랑스에서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총살되거나 학살된 남녀는 3만에서 4만 명에 이른다고 결론 내렸다. 또한 부역행위로 인해 재판과 선고를 거쳐 처형된 사람은 779명이라고 발표했다. 물론 이 숫자 역시 당시의 상황을 볼 때 정확한 숫자로 볼 수 없으므로 최소한 1만 명 이상이 약식 처형되었다고 추정한다.

이와 같은 반 나치저항 단체들의 나치협력자들에 대한 처단은 새로 태어난 임시정부의 법이라는 테두리 즉 임시정부의 공권력 하에서 시행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것은 드골의 임시정부 세력과 반나치 저항세력과 내분이 일어날 소지가 다분히 있었고 그러한 내분은 미국이 프랑스를 군정 하에 두어야 한다는 빌미를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드골은 나치협력자 숙청에 관한 한 정부의 업무를 강조하고 프랑스의 법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정통성은 사법을 담당하는 사람의 권위와 책임 하에 이뤄지는 정통 사법기구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조직적이고 체계화된 임시정부 조직이 가동된다면 미국과 영국이 프랑스를 넘볼 수 없다는 것이 드골의 생각이었다.

결론적으로 드골은 성공했다. 대내적으로 나치협력자를 숙청해 새로운 민주사회를 건설하고 대외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으로 인정받아 강대국의 지위를 다시 확보한 것이다. 드골이 여러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어려운 상황 하에서도 나치협력자 세력을 철저히 소탕해야 한다는 대전제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언론인과 지식인의 배반의 엄중성

프랑스는 톨레랑스(tolerance)' 즉 관용의 나라로 널리 알려진다. 18세기 계몽사상가 볼테르(Voltaire)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프랑스도 2차 세계대전 때의 나치부역자에게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그런데 이러한 프랑스가 전통적인 관용을 베풀지 않았음에도 드골이 나치협력자 청산에 있어 상당수 프랑스인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나치부역자들에 대한 설득력 있는 순차적인 처리 때문이다. 그가 제일 먼저 도마 위에 올린 사람은 언론인들을 포함한 지식인들이다. 그는 제일 먼저 언론인과 지식인들을 올린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론인들은 도덕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지식인과 작가는 사과로는 안 되고 반드시 책임을 물려야 한다 

드골의 지식인에 대한 굳은 의지는 그의 전쟁회고록에서 저명한 작가들을 포함한 지식인들을 숙청해야 하는 당위성을 다음과 같이 천명한데서도 알 수 있다. 

예술가가 가장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선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악에 대해서도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반대 진영을 선택한 작가들에 대해서 우리는 그들의 자극적 웅변술이 어떠한 범죄와 어떤 벌에 해당되는지를 너무나 잘 보고 있다.’

일반적으로 파리숙청재판정에 처음으로 끌려나온 나치협력 지식인은 조르주 쉬아레즈로 알려진다. 그는 전쟁 전에 유명한 클레망소의 전기를 쓴 역사가였으나 나치점령시절 친 비시정권 일간지 <오늘>의 정치부장을 맡았다. 검사는 쉬아레즈를 비롯하여 나치선전원으로 전락한 조국배반 언론인들을 준엄하게 심판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쉬아레즈는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자 프랑스를 방어해 주는 나라는 독일뿐이라고 기사화했고 영국과 드골의 도발자들이 폭격을 감행하면 나치로 하여금 유태인, 공산주의자, 프랑스 거주 미국인과 영국인을 인질로 잡아 대항하자고 말했다.

그의 죄상이 워낙 명백하므로 변호인은 나치독일 점령기간의 반역행위란 시간의 선택문제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문학적인 재주와 경력을 감안하여 판결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냉철하게 사형선고와 함께 전 재산몰수형을 선고했고 곧바로 처형되었다.

근래의 연구 자료에 의하면 쉬아레즈보다 <자동차>, <작은 니스사람들>, <공화주의 리옹> 등 신문을 발행한 알베르 르전이 먼저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곧이어 프랑스 최대 일간지 <르 마텡>의 편집국장 로잔은 나치점령시기에 프랑스 최대의 일간지가 버젓이 발행되기 위해서는 언론인의 간과 쓸개를 모두 내어놓아야만 했다고 변호했지만 2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수많은 신문사 사장, 언론인들이 민족반역자로 재판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주목을 끈 사람은 천재대학교로 유명한 파리고등사범 즉 에꼴 노르말(Ecole Normal) 출신 작가이자 언론인인 브라지야크로 그가 19451월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는 36세에 불과했다.

그의 재판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것은 프랑스가 낳은 보기 드문 인재라는 프랑스인들의 인식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나치협력은 너무나 다양하고 방대했다. 그는 드골 장군을 필두로 하는 <망명정부 자유프랑스> 요원 및 레지스탕스들은 테러분자이므로 엄벌해야 한다고 많은 글을 썼으며 독일에서 열린 히틀러 찬양세미나에 참가하기도 했다.

브라지야크는 프랑스를 이끌어 갈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검사로부터 더욱 큰 질타를 받았다. 검사는 다음과 같이 질책했다.

보통 사람의 배반보다 브라지야크와 같은 지식인의 배반이 수백 배 더 나쁘다.’

검사는 그를 단순한 나치협력 배반자보다 더 악질인 지성적 반역자로 규정했다. 그의 죄상을 볼 때 사형선고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문제는 많은 프랑스인들이 그의 사형선고에 찬성하면서도 그의 천재성이 안타깝다고 사면을 바랐다는 점이다. 또한 브라지야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가 독일로 도망갈 수도 있었음에도 프랑스에 남아 있었고 자수했다는 그의 용기를 높게 평가했다. 그는 나치협력신문 <새시대>의 편집국장이며 언론노조 회장인 쟝 뤼세르로부터 파리를 철수하는 나치독일군을 따라 독일로 피신하자는 제의를 받았지만 단연코 거부했다.

나치부역자들의 청산을 강력하게 주창한 사람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이며 레지스탕스 운동과 저항언론을 주도한 알베르 카뮈이다.

누가 감히 나치협력자에게 용서를 말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칼은 칼에 의해서만 이길 수 있고 무기를 잡아야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디어 우리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감히 누가 이 진리를 망각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가? 내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증오가 아니라 기억을 기초로 하는 정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형탄원서에 서명하여 드골에게 보냈다. 반면에 그의 사면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여류작가 시몬 드 보브아르는 브라지야크의 감형탄원서의 서명을 거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연대하는 작가 언론인들은 모두 나치독일의 게슈타포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레지스탕스 지식인들이다. 만일 내가 브라지야크에게 유리하게 손을 놀린다면 죽은 사람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을 것이 확실하며 그래도 나는 할 말이 없다.’

브라지야크 사면에 대해 논란이 가세되어 프랑스 지식인 59인은 드골에게 자신들이 서명한 진정서를 보냈다. 그러나 드골은 그들의 탄원을 기각했고 브라지야크는 사형선고를 받은 지 약 2주 후에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앙드레지드조차 숙청될 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문호 앙드레 지드도 숙청의 도마에 올려질 뻔했다. 앙드레 지드는 무엇보다도 저항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점에 대해 레지스탕스와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의심을 받았다. 우선 그는 프랑스가 나치독일에 점령된 후 남부 프랑스 자유지역으로 먼저 도피했다가 알제리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더구나 앙드레 지드는 나치독일 점령시절 파시스트로 광적인 나치찬양자가 편집장을 맡은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발간하는 잡지에 두 번이나 일기를 기고한 적이 있었다. 저항운동에 참여한 지식인과 작가들이 거의 모두 기고를 거부했는데 유독 지드만이 기고했기 때문에 더욱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다행스럽게도 지드는 더 이상 잡지에 기고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지드가 파시즘이나 나치즘을 찬양하는 글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재판에는 회부되지 않았다. 지드와 같은 지식인에 대해 숙청설이 오갔다는 것은 그만큼 언론인, 작가들에 대한 숙청이 철저했다는 뜻이다.

파리해방 직후 프랑스에서 최초로 응징된 나치협력자들은 모두 언론인들과 작가 등 지식인들이었다. 이와 같이 드골이 처음부터 지식인들을 숙청 대상자로 삼았기 때문에 나치협력자 숙청을 둘러싸고 야기될 수 있는 수많은 비판여론이나 문제점들을 간단하게 잠재웠다.

 

전환기를 맞은 페탱의 재판

드골이 주도하는 프랑스 임시정부가 나치협력자 청산을 순조롭게 진행시키고 있었지만 문제는 비시정권의 수반이자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거물 페탱 원수의 처리였다. 드골은 괴뢰 비시정권의 수장인 페탱을 반드시 재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페탱에 대해서는 많은 프랑스인들이 존경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 걸림돌이었다. 페탱은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으면서 미국과는 외교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등 상당히 현명한 외교정책으로 프랑스를 제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벗어나 중립지대로 남아있게 만들었다. 특히 히틀러의 동반자 또는 나치 독일의 괴뢰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군과의 전쟁을 피하는 슬기도 보여주었다.

더욱 프랑스인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페탱 원수가 나치협력 민족반역자로 규정되면 비시정권의 각료들과 공직자들 모두 나치협력자로 낙인찍히는 것이 된다는 점이다. 대다수 프랑스 국민들도 비시정권이 비록 독일에 사실상 항복한 후 등장한 정부이긴 하였지만 그 자체가 무효인 정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비시정권은 당시의 제3공화국 헌법에 따라 구성된 합법적인 정권이었다.

하지만 비시정권이 프랑스와 국민의 방패는커녕 그들을 향한 '흉기'가 된 점이 지적되었다. 레지스탕스를 비롯한 프랑스 애국자들을 처형 등에 앞장선 민병대의 존재이다. 1941년 봄에 다르낭에 의해 창설된 프랑스전사단보안대(SOL)1943년 민병대로 정식 전환되는데 이 조직은 준군사조직으로 공식적인 경찰과 별도로 공산당원들과 레지스탕스를 학살하고 탄압하는데 이용되었다.

 

페탱에 대한 까뮈의 독설과 모르네검사의 비판

페탱의 공과에 대해 논란이 지속되는 중 알베르 까뮈는 사설에서 다음과 같은 독설을 퍼부었다. ‘페탱이 뭔가 재능이 있었다면 그것은 창녀와 같은 것이었다. 다시는 프랑스 사람들이 나이와 허황함의 트릭에 의해 유약해 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페탱이 프랑스 내에서 독일과 싸웠다고 하는 변론에 모르네 검사는 다음과 같이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페탱에 대한 온정론에 대해 철퇴를 가했다. ‘프랑스에서 15만 여명의 프랑스인 인질과 레지스탕스가 나치 독일군에 의해 총살되었고, 75만 여명의 노동자들이 나치 군수공장에 강제 동원되었으며 11만 여명의 프랑스인들이 저항운동 등 정치적 이유로 나치집단수용소에 유배되었고 12만 여명은 인종차별정책으로 나치수용소에 이송되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살아 돌아온 프랑스 사람은 전혀 없다.’

결국 재판부는 비시정권은 불법이고 무효이며 나치독일에 협력한 범죄 집단으로 규정한 후 페탱을 상대로 배심원 표결 결과 14 : 13 단 한 표 차이로 사형의 결론을 내렸고 모든 재산이 몰수되었다. 1944815일의 일이었다. 페탱 원수는 감형되지 못하고 58개월 간 감옥생활을 한 후 1951723일 수감 중에 사망했다.

 

비시 정권의 파시스트 총리 라발의 처형

비시정권의 국가원수인 페탱이 재판을 받자 그의 휘하에 있던 많은 관리들이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재판 중에 가장 프랑스인들을 화나게 만든 사람은 비시 정권의 파시스트 총리 라발 등 비시정권 추종자이다.

라발은 독일에서 스위스로 탈출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그 대신 스페인에 3개월간 체류할 허가를 받았다. 나치의 도움으로 연합군의 체포를 면하고 독일 비행기로 스페인으로 날아가 프랑코의 환대를 기대하였으나 스페인은 19447, 그를 독일로 축출하였고 거기서 미군에게 체포되어 다시 프랑스군에게 인계되었다. 그는 재판정에서 계속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여 프랑스인들을 격분케 했는데 판결은 예상대로 109일 사형이 선고되었다. 드골은 재심 신청을 거절하고 사형을 그대로 추인하였다.

한편 1944820일 비시 정권 각료와 지지자들은 독일군의 경호를 받으며 독일로 들어가 망명정부를 세우고 19454월까지 버텼다. 하지만 결국 비시 정권의 각료 등 대부분은 프랑스의 임시정부에 의해 재판을 받고 상당수 처형당한다.

드골이 페탱과 라발에 대한 역사상 최대의 재판을 종결함으로써 나치협력자 청산이라는 중대한 고비를 무사히 넘긴 것이 그 후에 벌어지는 많은 사건들을 무난히 마무리하게 만들었다고 학자들은 인정한다. 비시 최고지도자 두 명에 대한 재판이 말끔하게 끝나자 아무도 드골의 나치협력자 숙청에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프랑스의 독일 점령 하에서 대표적 부역자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비시정권은 나름대로 존립과 정당화의 여지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자신의 어두운 역사와 부끄러운 과거를 과감하게 도려내는 역사적 과업을 수행함으로써 민족적 정통성을 곧추세웠다. 학자들은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프랑스 사람들이 나치독일의 점령이라는 민족적 수치와 굴욕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종전 반세기를 계기로 참된 민주주의를 위한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흔히들 나치협력자로 불리는 민족반역자들을 엄정하게 처단하여 민주주의를 올바로 세웠다는 자부심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프랑스는 4년여 동안의 나치점령시기, 역사로부터 떼어내고만 싶은 암울했던 점령기를 과거에 대한 준엄한 심판과 처단을 통하여 극복했으며, 그 당연한 결과로 가장 선진적인 민주국가를 건설하는데 성공했다. 나치협력자에 대한 처단을 통해 프랑스가 보여준 과거청산의 본보기는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자유와 사회정의, 그리고 인권이 참되게 존중받는 민주국가 건설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고 평가해도 지나침이 없다.’

 

민족반역자는 프랑스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외국인

구체적으로 드골 정부의 나치협력자 청산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민족을 배반한 경찰과 판검사가 나치협력자를 심판할 수 없다는 대 전제아래 경찰과 사법부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벌여 1944년 말에 이미 5,000여 명이 경찰이 체포됐다. 403명의 판사들이 나치협력 혐의를 받았는데 이것은 전체 판사의 17퍼센트에 이르는 수치였다.

나치협력 외교관에 대한 숙청은 속전속결로 이뤄졌는데 19451월에 대사급 75퍼센트, 공사급 40퍼센트, 참사관급 25퍼센트가 처벌받았다. 교육성도 무려 6,000여 건의 나치협력자 혐의사건을 심사하여 교육성의 고위공직자 357명이 직위박탈 등의 중징계를 받았다. 물론 초기 숙청이 다소 무리한 점도 있어 1953년 이후 500여 건의 재심 청구가 들어와 모두 이유 있다고 판정되어 원상회복 조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드골이 매우 고심한 것은 군부의 숙청이다. 그는 우선 나치독일에 대해 유리한 입장을 취한 군의 조직이나 단체에 가담한 장교나 하사관은 모두 파면시킨다고 규정했다. 1946년 말까지 모두 10,270명의 장교들이 조사 받아 650명이 파면 당했고 2,570명이 전역 당했다. 지방공무원도 5만여 명이 나치협력혐의로 조사 받았다. 프랑스임시정부의 공식적으로 16,113명의 고위공직자들이 응징되었다고 발표했다.

 

경제부문은 상대적으로 관대한 처벌

정계의 숙청을 단행한 드골은 나치독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거나 지원한 대기업 사주들도 예외 없이 숙청했다. 드골은 나치협력 대기업 소유주의 재산을 몰수했고 그의 기업을 국유화했다. 물론 국유화되는 기업들의 주식은 정부가 현 시가대로 보상하여 선량한 주주에게는 손해를 주지 않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드골이 기업을 국유화하는 것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았다. 그것은 프랑스가 자랑하는 사유재산을 침해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드골은 이와 같은 비난에 대해 세계대전의 폐허에서 사회개혁과 경제복구 즉 프랑스국민의 공동이익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행하는 긴급조치라고 대답했다. 드골은 개인의 이익을 다소 희생하더라도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프랑스가 패전한 것 같은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국가와 국민 전체의 이익을 먼저 수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골의 기업 즉 경제부문에 대한 숙청은 정치, 행정, 언론 등 다른 부분에 비해 매우 관대했다. 프랑스에서 가장 큰 규모의 자동차 회사인 르노는 국유화되었고 사주 루이 르노는 옥중에서 사망하였지만 기업의 대표가 구속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으며 대체로 재산몰수형에 처해졌다. 드골도 전후 경제회복을 위해 기업활동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부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드골의 국유화 정책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 대기업들이 나치점령시절 나치독일의 경제와 군수물자를 지원하기 위해 자의든 타의든 동원됐다는 약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당시 국유화된 대기업으로 프랑스의 유명한 항공사 에어 프랑스’, 세계적인 자동차를 생산 회사인 르노’, 파리지하철 등이 있다. 누구도 감히 드골의 대숙청과 국유화 조치 등 경제개혁에 비판을 하지 못한 것은 드골 개혁이 갖고 있는 고도의 공정성 때문이었다.

 

언론사 처리문제가 드골의 나치협력자 숙청의 핵심 요소

언론사의 경우도 예외가 없었다. 나치점령군과 비시정권의 지시와 규정에 순종한 언론사는 물론 나치독일의 프랑스 점령이후 창간된 모든 신문과 잡지들을 대상으로 소유주가 재판을 받는 경우 모두 발행 금지시켰다. 또한 소유주가 실형을 받으면 그 언론사는 곧바로 폐간되었다. 물론 문학과 스포츠 등 정치성이 전혀 없는 전문지는 이 조치에서 제외되었다.

신문사에 대한 재판은 1945년 말부터 시작되었는데 1948년 말까지 모두 538개 언론사들이 재판에 회부되어 이중 115개 사가 유죄선고를 받아 폐쇄됐고 64개 사가 전 재산 몰수, 51개 사는 일부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30개 언론사만이 무죄선고를 받았다. 전쟁 전부터 발행되던 유력 신문사 중 살아남은 것은 <르 피가로>, <라 크로와>, <르 탕> 3개뿐이었다. 이 신문들은 독일군의 점령과 함께 파리에서 지방으로 피난하였으며 점령기간 중에 정간함으로써 민족의 양심을 지켰다.

언론사 처리문제가 드골의 나치협력자 숙청의 핵심 요소였다는 것은 그의 전쟁회고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알제리 시절부터 정부는 파리해방 때 언론문제를 최우선적으로 처리키로 결정했다. 194456일 훈령을 통해 적이 지배한 지역에서 발행한 신문들은 파리해방 후 발행할 수 없다. 신문사의 재산을 몰수하며 건물과 시설들은 지하의 저항신문들이 임대해 쓴다.’

출판사에 대한 숙청의 큰 골격도 마련됐다.

출판사 등의 민족배반 행위를 법적으로 밝혀내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멘트나 가죽을 적에게 팔아 단순히 돈을 버는 일보다 장단기적으로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유명한 <갈리마르 출판사>가 폐간 위기에 몰리기도 했고 수많은 출판사들이 문을 닫았다.

연예계에 대한 숙청도 빠지지 않았다. 먼저 예술직업인증명서 발부제도를 창안해 증명서 소지자에 한해 무대예술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는데 나치협력혐의가 조금만 있어도 증명서는 발급되지 않았다.

연예계는 다른 분야에 비해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그것은 프랑스 연예인들의 철저한 직업의식 즉 예술가적 기질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나치점령시절 프랑스의 자체영화산업은 거의 무너졌고 독일자본으로 설립된 <컨티넨탈필름>이 프랑스 영화산업을 장악했다. 그러나 나치독일의 선전영화가 프랑스인들에게 외면을 받자 나치도 프랑스의 예술성을 인정하면서 상당한 자율성을 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나치점령시대이기는 하지만 영화감독들은 점령당국의 간섭을 거의 받지 않고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나리오 검열도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이 당시 제작된 앙리 크루조 감독의 까마귀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화사상 가장 걸작 중에 하나로 뽑힌다. 이것은 <컨티넨탈 필름>이 프랑스에 있는 독일영화사이지만 작품을 만드는 프랑스 감독들이 독립적으로 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영화계의 숙청은 그야말로 미미하여 5명이 견책을 받았고 1명이 직업 활동 금지령을 받았을 정도이다.

프랑스 최고의 영화배우이며 샹송가수였던 모리스 슈발리에는 독일의 포로수용소에서 노래를 부른 사실로 조사 받았지만 무죄가 되었고 세계적인 여가수 에디트 피아프에게도 독일 공연을 문제 삼아 조사했지만 프랑스 포로의 수용소 탈출에 필요한 여권을 만드는데 협조한 것이 인정되어 역시 무죄 선언을 받았다. 오히려 재판부는 공식적으로 피아프에게 사죄까지 했다. 에디트 피아프가 만든 가짜여권은 무려 147개나 되었다.

드골은 초반부에 유명 언론인과 지식인들, 그리고 비시 정권의 최고지도부를 심판해 가혹할 정도로 엄벌을 내린 후 비시정권 공직자들, 지방공무원들, 사법부와 군부, 교육계와 경제계, 출판인과 연극인 및 영화계, 미술계, 석학집단인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나치협력자들을 차례로 숙청했다. 프랑스의 숙청 논리는 매우 간단했다.

나치전체주의에 민족의 혼과 정신을 팔아먹은 민족반역자는 프랑스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외국인이나 마찬가지다.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는 이념을 달리한다고 해도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역적은 아니며 단지 국가의 관리와 경영을 달리하는 이념의 소유자라고 볼 수 있다.’

 

프랑스를 팔아먹은 사람은 프랑스인이 아니다

드골의 정책목표는 나치협력 민족반역자를 신속히 숙청해야만 프랑스의 위상도 올라가고 국내 질서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에 있어 가장 큰 특징은 언론인 등 지식인들을 제일 먼저 숙청하여 민심을 임시정부 측으로 돌려놓은 것이 가장 큰 성공의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드골은 조속한 시일 안에 프랑스를 새로운 틀로 개혁시키기 위해서는 다소 인기몰이식인 언론인을 비롯한 지도층만 척결해서는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드골은 부역죄(indignite nationale, 국민자격의 박탈)라는 특별법을 만들었다.

부역죄는 나치협력 반역혐의로 정식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았으나 나치에 협력을 시도하거나 도움을 주려고 한 일반인 등 경미한 나치협력사범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즉 부역죄는 나치독일과 공개적으로 협력한 비시정권의 명령과 지시에 복종한 국민들, 국가반역죄로 다스릴 수 없는 비시 정권 지지자들, 나치점령기간 합법성을 가장한 비시정권의 법을 솔선해 준수한 자들을 다스리기 위한 법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나치독일에 협력한 프랑스 상층부는 물론 하층부 사람들도 모두 속아낸다는 뜻이다. 부역죄의 큰 골격은 국적박탈의 형벌이 자동적으로 병과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부역죄는 형을 선고받은 모든 나치협력자에게 병과되었고 심지어는 알제리에서 사형된 나치협력 반역자에게까지 소급해 적용됐다.

부역죄를 선고받은 부역자들은 선거권과 피선거권 및 공직 진출권이 박탈되며, 공무원, , 변호사, 회계사, 교원, 노동조합원, 언론인과 모든 통신과 정보업무에서 추방되고 심지어는 개인기업의 대표이사는 물론 이사로도 참여할 수 없도록 제한했다.

물론 이와 같은 부역죄는 이중처벌이라는 반대론이 고개를 들기도 했다. 특히 자동적으로 재산몰수형을 가하는 것은 너무 심한 형벌이라는 말도 있었으나 국민의 단결을 해치고 프랑스인의 자유와 평등을 침해한 행위를 한 자가 바로 부역죄를 저지른 자라고 공식적으로 규정하면서 여론을 유도하자 프랑스인들도 빠른 시간 안에 프랑스를 정화시키기 위해서는 필요한 법이라고 인식했다.

드골은 프랑스를 팔아먹은 사람은 프랑스인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프랑스는 매국노가 아닌 프랑스인에 의해서 건설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치협력자 숙청이란 결국 프랑스 사회를 완전히 정화해줄 수 있는 방편이라는 뜻이다. 이점이 바로 프랑스가 해방된 후 다른 나라와 같이 좌파와 우파가 분리되어 극심한 혼란을 겪지 않고 국민 전체가 나치협력자 색출과 조국 건설에 앞장 설 수 있게 된 요인이라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반면에 프랑스점령기간 동안에 프랑스를 위해 싸운 레지스탕스들은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보상과 응답을 받았다. 사실상 레지스탕스운동을 벌인 프랑스인은 엄청난 숫자였다. 전쟁이 끝난 후 30만 명이 공식적으로 레지스탕스 경력자로 인정받았는데 이 숫자는 당시 성년 남자의 2퍼센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1944년으로부터 1947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주로 좌익으로 구성된 레지스탕스 세력은 정계의 다수를 이루었다. 상대적으로 전통적 우익을 포함하여 우익 정치세력은 비시정권의 몰락과 함께 거의 회복불능 상태로 되었다. 특히 비시정권에 손을 들어주었거나 직접 비시정권에 참여하였던 302명의 하원 및 상원의원들이 피선거권을 잃었다. 이 가운데 반이 넘는 163명이 1936년에 중도 또는 우익에 속하는 의원들이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또는 레지스탕스 신문들이 전체 일간신문 구독율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고 특히 공산주의계열의 신문 구독자수는 전전보다 네 배를 넘어섰다. 레지스탕스라는 이름은 일종의 성스러운 상징이 되어 모든 문을 여는 열쇄'로 간주되었다.

2004년 파리는 파리해방 60주년 축제에서 레지스탕스 1,750명의 거리와 광장에 부치는 명명식을 거행했다. 북부 레지스탕스 리더 로제 발쟝의 이름은 파리 4구의 광장에 부쳐졌다. 파리 봉기를 주도한 지도자 탕기는 파리15, 노조지도자 토레는 파리 10, 드골임시정부 공산당각료 티용은 파리 19, 드골의 동반자 샤방 델마스와 프라숑, 에슈타인 등의 이름도 포함되었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프랑스의 부역자 처리가 완벽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라고 지적하는 학자들도 있다. 부역자 처리과정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진행되어 무고한 희생자를 내기도 하였고 재빠른 종결로 미진하게 끝난 사건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우경화 현상이 초래되고 사면이 이루어 졌다고 하지만 그것은 국민적 화해의 대의명분 아래 이루어졌던 것으로서 부역자처단의 원칙 자체가 흔들린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부역자들에 대한 처단의 필연성과 그들의 죄악에 대한 비판의식은 일반 국민들 사이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시효가 없는 나치협력자 청산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은 속전속결이 특징이다. 최고재판소가 형식적이나마 1960년까지 운용되었지만 대부분의 숙청은 1951년에 종지부를 찍어 단 6년 만에 숙청재판을 종결했다.

프랑스의 연감 퀴드2003년 판은 나치협력자 청산결과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치협력자 조사대상 150200만 명, 체포되어 조사 받은 자 99만 명, 최고재판소와 숙청재판소에서 재판된 사건은 57,100여 건, 6,766명에 사형선고, 782명 사형집행, 2,802명에게 유기징역형, 3,578명에 공민권 박탈했고 시민재판소에서 115천 건을 재판에 95천 명에게 부역죄을 선고받았고 공직자 12만여 명은 시민재판소에서 행정처분을 받았다.

재판 받은 사람들은 군대 장교 42,000여 명, 정부 관료 28,750, 경찰간부 170, 판검사 334, 헌법위원 18명이다.‘

그러나 나치협력자 숙청결과는 이보다 더 많다는 것은 정설 아닌 정설이며 드골도 회고록회고록에서 적어도 1만 명 이상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물론 서슬이 시퍼랬던 나치협력자 청산도 시간이 지나면서 부드러워져 최초에 선고된 형량을 모두 채우는 나치협력자들은 점차 줄어들었다. 1951년에 이미 강제노동형 수형자 406명이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나치협력자들이 일부 가석방의 은전을 받아 풀려났더라도 사회에서 부역죄라는 형벌이 계속 발목을 잡아 정상 활동이 불가능했다. 피선거권은 말할 것도 없고 투표권도 박탈당했으며, 공직은 물론 언론이나 국영기업체에도 진출이 차단됐다.

폭풍우와 같았던 나치부역자들에 대한 재판이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이들에 대한 사면 요구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사면의 당위성으로 프랑스인들의 관대함, 국가적 화해, 점령기간 동안에 범해진 범죄의 일정한 정치적 성격, 이탈리아와 독일에서의 화해정책의 선례 등을 꼽았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195115일의 통과된 최초의 사면법은 공민권박탈판정을 받았거나 15년 이하의 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모두 사면하는 내용이었다. 동시에 이 법은 강제로 징용되었거나 21세 이하의 청소년이었거나 대부분의 형기를 채운 사람들에 대한 구제도 포함하고 있었다. 물론 중대한 범죄나 고등법원의 결정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19527월에는 국가적 일치라는 기치를 내걸고 보다 총체적 사면을 약속하는 제안이 나왔다. 이들은 4공화국은 이해와 인간성을 보여줄 만큼 충분히 강력하며 가중되는 위기 속에서 모든 프랑스 국민의 단합이 그 어느 때 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특히 조국이 내일 위험에 처한다면 그 방위를 위하여 프랑스의 모든 자녀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결국 19537월 두 번 째의 사면법도 통과되었고 특별히 심각한 범죄를 제외하고 당시까지도 복역하고 있던 부역자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사실상 이 법에 프랑스의 부역자에 대한 처단은 끝이 났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가 공식적으로 해방된 1945년을 기산으로 한다면 8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부역자 문제를 처리한 것이다.

그런데 드골의 숙청은 벨기에,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의 숙청에 견주어 보면 오히려 온건한 청산이라는 평가도 있다. 사실 사형이 집행된 나치협력자는 프랑스가 수적으로 가장 많지만 강제노동형이나 징역형을 받은 나치협력자는 인구비례로 볼 때 프랑스가 가장 적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랑스에서 38,000여 명에게 징역형이 선고되었는데 이는 인구 10만 명당 평균 94명이 감옥에 간 것을 뜻한다. 반면에 덴마크의 경우, 14,000 명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는 인구 10만 명당 평균 374명이며, 네델란드의 경우 10만 명당 419, 벨기에의 경우는 10만 명당 596, 노르웨이는 10만 명당 633명이다. 노르웨이는 프랑스에 비해 무려 6.6배나 더 많은 수치를 나타냈다.

유럽에서 나치점령을 경험한 국가는 프랑스만은 아니지만 부역자처리에 적절한 반역죄 등 처벌에 관해 전쟁 전 입법을 통하여 갖추고 있는 나라는 없었다. 그러므로 노르웨이, 네덜란드, 덴마크에서는 소급입법과 금지된 사형을 재도입하여 이들을 처리했다.

나치협력 민족반역자를 가장 철저히 응징한 나라는 노르웨이로 모두 92,000여 명에 대한 민족반역 혐의를 수사하여 그중 절반이 넘는 47,500명이 최소한 벌금형 이상의 형을 선고받았다. 노르웨이는 사형이라는 극형을 선고하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숙청처럼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모으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은 드골 시대로 모두 끝난 것은 아니다. 프랑스는 1964년대에 자국형법에 반인도적 범죄에 관한 법을 병합해 국가반역죄와 반인권범죄 및 인종차별범죄에 관해 시효가 없이 체포해 재판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했다.

반인도적 범죄란 정치적, 인종차별적 및 종교적 목적으로 시민을 살해, 몰살, 노예화 및 유형에 처하거나 고문하는 등 박해를 가하는 범죄로 정의되는데 이 법은 서유럽 선진 민주국들이 모두 자국 형법에 편입시켜 일반화되었다고 주섭일 박사는 설명했다.

그러므로 미테랑 대통령의 좌파정부는 1983년 레지스탕스 영웅 장 물렝을 고문 살해한 리용지역 나치 게슈타포의 바르비를 남미 볼리비아에서 체포해 재판했다. 바르비에게는 프랑스에서 사형이 폐지되었으므로 무기징역형이 선고되었다.

1992년에는 드골의 나치협력자 숙청 때 도주해 2차례나 궐석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폴 투비에도 체포되어 무기징역형이 선고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79세의 고령이었다. 그럼에도 정상참작은 없었고 두 사람 모두 감옥에서 사망했다.

1998, 비시정권의 보르도 경찰서장 모리스 파퐁이 나치협력자의 심판대에 올랐다. 그는 비시정권하에서 레지스탕스에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드골의 집권 후에도 그는 현직에 그대로 머물렀으며 오히려 랑드 주지사로 승진까지 했다. 지스카르 데스텡 대통령 하에서는 예산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그런데 40년이 지난 후 과거의 그의 행적이 보다 세밀하게 검토되면서 그가 숨겨온 비밀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독일의 요청에 의해 유태인을 추방하는 문서에 모리스 파퐁의 서명이 계속 발견된 것이다. 당시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고 있던 유태인들을 사지에 몰아넣은 행위는 물론 시효가 배제되는 비인도적 범죄에 해당되었고 10년 징역형을 받았다. 그의 나이 90세였다.

반 세기를 넘긴 뒤에 나치 부역 행위자를 재판정에 세우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르몽드> 기자가 한 중학생에게 위와 같이 질문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인간적으론 안 된 일이지만 역사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학생의 답변은 역사란 과거만이 아니라 오늘이기도 하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프랑스는 나치독일에 협력한 배반자들을 외세와 내통한 이적죄간첩죄를 적용해 대담하고도 대단히 가혹하게 심판하고 처벌했다. 그리고 반 나치레지스탕스에 참여한 좌우파 정치인과 애국적 시민들로만 새로운 주체세력을 형성해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주적인 프랑스 국가를 건설했다.

드골은 프랑스를 새로 이끌 정부를 구성하면서 이념 문제에 크게 우려하지 않고 좌파든 우파든 레지스탕스에 참여한 세력을 총체적으로 통합함으로써 나치협력자들이 프랑스 내에서 근거를 갖지 못하도록 차단하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나치청산#역사청산#친일청산#드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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